Reading/인용문 에세이

책 <몽테뉴의 살아있는 생각> - 부모와 자식간의 불편한 진실

리딩잇팅 2025. 4. 25. 10:00

 
몽테뉴의 살아있는 생각
밖에 없었는지 서술한다. 『수상록』은 일상의 일들과 세상사에 관한 생각을 담은 어렵지 않은 글이지만, 이 책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방대한 분량과 고전 문장 특유의 난해함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몽테뉴의 살아있는 생각』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앙드레 지드가 『수상록』에서 골자만 뽑아서 엮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독후감 같은 글로 대중과 교감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앙드레 지드는 이 책의 서두에 『수상록』을 해석하면서 느낀 소회를
저자
앙드레 지드, 몽테뉴
출판
서교책방
출판일
2025.01.01
나는 자기 이름을 물려받고 명예를 잇는 자식을 통해 미래와 연결된다고들 말하는 강력한 유대감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런 까닭으로 자식들이 필요한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자식을 더욱 바라지 않을 것이다.
책 <몽테뉴의 살아있는 생각> 中

기숙사 사감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부모에게 의존하는 아이들이 참 많다는 것이다. 20살이 넘었으면 성인이다. 성인이라면 자기 자신의 행동과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무엇을 하든지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씩, 아니 오히려 자주 학생이 민원을 넣어야 할 일을 부모가 직접 민원을 넣는 경우가 있다. 기숙사에 무엇이 불편하다부터 시작해서 당신은 기숙사 사감이면서 대체 뭐 하냐는 등의 민원전화를 받아봤다. 특히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부모들의 민원전화를 많이 받는다. 바로 기숙사 지원 문의 때문에 그렇다. 기숙사를 지원하는 방법이나 지원 조건 등을 학생이 전화해서 문의하지 않고 부모가 전화로 문의하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자식이 얼마나 걱정이 되면 저럴까?'라며 생각한다. 난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자식도 없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이걸 학생이 직접 챙겨야지 왜 부모가 대신하고 있나'라고 생각이 든다. 사실 후자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기숙사 신청이나 기숙사 지원 조건 같은 건 학생이 직접 해도 될 일인데 부모가 대신해 주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민원 전화 중에서 가장 어이가 없었던 경우는 자기 자식이 전화가 안 돼서 방에 가서 확인을 좀 해달라는 민원 전화를 받을 때다. 물론 '자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걱정이 되겠지', '그래 이런 전화는 부모라면 할 수 있지'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니 이런 걸 가지고 민원 전화를 한단 말이야?'라고 생각이 든다. 내가 자녀가 없어서 그런가? 자녀가 있으면 나도 저런 부모처럼 될까? 아무튼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다. 부모야 걱정은 되겠지만, 막상 이런 학생들은 그냥 친구들을 만나서 밖에 나갔거나 아니면 기숙사 호실에서 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데도 부모의 과도한, 불필요한 걱정으로 인해 기숙사로 민원 전화를 건다. 아니면 그런 학생의 경우엔 부모의 과도한 관심을 싫어하는 학생도 있다.


그런데 최근에 학교를 다니면서 저런 부모보다 더 한 경우를 봤다. 물론 내 동기의 얘기인데(동기지만 그 친구는 올해로 21살이므로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그냥 '그 친구'라고 하겠다), 그 친구는 학교를 온 이유도 자기가 선택해서 온 것이라기 보단 부모가 시키는 대로 왔으며 부모가 가라는 대학에 편입을 위해서 학교에 왔다. 그리고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으며, 남자친구가 생겨서 연애를 했는데 집에서 연애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는지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들켜서 된통 혼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남자친구는 험한 꼴을 당했다(말이 좋아 험한 꼴이지 적기엔 좀 부적절한 것 같아서 일부러 적진 않겠다). 그야말로 부모에게 완전히 순응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의존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인생을 살고 있는 친구다. 아직도 현실에서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왜 그 부모는 그 친구에 대해 그렇게도 많이, 아니 조금 심하게 관여할까? 

 

나는 자기 이름을 물려받고 명예를 잇는 자식을 통해 미래와 연결된다고들 말하는 강력한 유대감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런데 몽테뉴의 시대에도 이런 부모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 자식을 다른 부모보다 뭔가 더 각별하다고 여기는 부모 말이다. 이런 현상이 몽테뉴 시대에도 있었다니... 어쩌면 세상은 생각보다 많이 바뀌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변하면서 기술도 발전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지만, 한편으론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뭔가 변하지 않는 인간의 습성이 있는 것 같다.

그게 몽테뉴가 말하는 부모의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 각별함이 수준을 넘어서면 더 이상 사랑이라 부르기 힘들다. 어쩌면 자기 자식을 성인이 되어서도 성인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부모의 인지부조화가 아닐까? 몽테뉴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나 이 부모의 인지부호화는 바뀌지 않는 현상인 것 같아 조금 씁쓸하다.